원수를 사랑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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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비센탈(Simon Wiesenthal)의 『해바라기』(The Sunflower)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나치 독일의 어느 병사가 죽음의 침상에서 비센탈에게, 나치가 불을 지른 한 건물에서 어떤 유대인 가족이 도피하려고 할 때 자신이 그 가족을 살해했노라고 고백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 병사는 유대인 시몬 비센탈에게 용서를 받기 원했던 것이다. 그는 희생자의 자비를 간절히 원했지만 희생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대리자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마음 속에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비센탈은 한 마디 말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나고 만다. 그런 행동의 이면에는, 자신은 그 범죄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으리라.
예수님의 출생 전부터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기원전 63년 예루살렘을 함락한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예루살렘 성벽이 높은 곳에 위치한 까닭에 함락하는 것이 쉽지 않자,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군사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노려, 안식일에 성을 공격할 수 있는 높은 토담을 쌓았고, 결국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높은 성탑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이 전투로 인해 2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자신들의 종교심을 약점 삼아 승리를 거둔 로마를 얼마나 증오했을까?
고대 근동(近東,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서아시아 일대)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법전에 기록된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통용되었고, 바빌로니아 왕국이 망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예수님도 설교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고 언급한 것이다(마 5:38)”.
이러한 정서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파격적인 가르침을 전해주신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마 5:28~29)
예수님의 원수사랑은 파격 그 자체였다. 누구도 선뜻 행하기 어려운 말씀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하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마 5:35)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그렇게 원수 사랑의 삶을 살 것을 명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파격을 몸소 행해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들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롬 5:10).
한 기자가 감옥에 들어가 사람을 끔찍하게 살해한 범인들을 인터뷰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기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내 어머니를 증오합니다. 그리고 내 몸속에 흐르는 내 피를 혐오합니다!” 결국 자기 혐오가 끔찍한 살인으로 이어진 것이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에 사용된 “사랑”은 ‘아가페’다. 아가페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다. 우리는 먼저 ‘내 안의’ 원수, 자기 혐오와 증오를 멈추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영어의 heal, holy, health, whole이라는 단어는 같은 어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치유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거룩한 사람은 전인이 건강한 사람이다. 전인이 건강한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온전한 사람은 자기 내면의 어두운 상처를 덮고 억압하고 살아가는 자가 아니다. 그 상처를 십자가 밑에 내려놓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가진 자신을 이해하고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안아 주는 사람이다. 그럴 때 우리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그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원수가 사라진 마음에는 원수가 생겨날 수 없다.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36절). 하나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다(마 5:45).
예수인교회 담임
본지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