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아픔과 보이지 않는 신음, 교회의 두 눈은 어디를 향하는가
월드미션신문 기자
작성일 2026-07-02 08:10
본문
지구 반대편 베네수엘라에서 들려온 비통한 소식에 한국 교회가 즉각적인 기도의 제단을 쌓고 나눔의 손길을 모으고 있다. 갑작스러운 강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신음하는 이들을 향한 한국 교회의 신속한 연대와 사랑의 실천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재확인하는 귀한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먼 곳의 가시적인 재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표한 ‘기독교인의 우울 경험과 인식’ 조사는 우리 발밑의 땅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지진계와 같다. 성도 세 명 중 한 명이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교회는 종종 그들의 아픔을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섣부른 진단으로 외면하거나, 침묵 속에서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교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성도들의 우울감은, 화려한 예배당 뒤편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신음이다. 우리는 베네수엘라의 무너진 건물더미는 보면서, 어찌하여 우리 곁에서 무너져 내리는 형제자매의 마음은 보지 못하는가.
이러한 돌봄의 공백을 메울 해답은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구호에 있지 않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 있다. 호남신앙동지회 장로들이 정기총회에 모여 ‘겸손’의 도를 되새기고, 평신도 지도자들이 바이블아카데미를 통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희망의 실마리를 찾는다. 교회의 직분은 섬김을 위한 것이며, 말씀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긍휼의 넓이를 확장하기 위함이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시선이 한 인물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목도할 수 있다.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의 포화 속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의 상처를 밤낮으로 돌보며 ‘등불을 든 여인’으로 추앙받았다. 그녀는 세상의 가장 참혹한 고통을 직시하고 그 안으로 뛰어든 실천적 사랑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녀 자신은 평생 극심한 우울증과 무력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했다. 나이팅게일의 삶은 가장 위대한 헌신 속에서도 개인의 영혼은 깊은 어둠을 헤맬 수 있음을 증언한다. 만약 당시 교회가 그녀의 외적인 업적만을 칭송하고 내면의 신음에는 귀를 닫았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쪽 눈을 허락하셨다. 한쪽 눈으로는 세상의 고통을 바라보며 긍휼을 베풀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우리 공동체 내부의 상처 입은 영혼을 세밀히 살피라는 뜻이다. 평신도바이블아카데미 종강예배에서 되새겼던 주님의 초대는 바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한국 교회는 이제 베네수엘라를 향한 구원의 방주가 되는 동시에, 우울과 불안에 잠긴 성도들에게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보이는 아픔과 보이지 않는 신음 모두를 끌어안는 것, 그것이 바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을 배워 그분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교회의 참된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먼 곳의 가시적인 재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표한 ‘기독교인의 우울 경험과 인식’ 조사는 우리 발밑의 땅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지진계와 같다. 성도 세 명 중 한 명이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교회는 종종 그들의 아픔을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섣부른 진단으로 외면하거나, 침묵 속에서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교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성도들의 우울감은, 화려한 예배당 뒤편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신음이다. 우리는 베네수엘라의 무너진 건물더미는 보면서, 어찌하여 우리 곁에서 무너져 내리는 형제자매의 마음은 보지 못하는가.
이러한 돌봄의 공백을 메울 해답은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구호에 있지 않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 있다. 호남신앙동지회 장로들이 정기총회에 모여 ‘겸손’의 도를 되새기고, 평신도 지도자들이 바이블아카데미를 통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희망의 실마리를 찾는다. 교회의 직분은 섬김을 위한 것이며, 말씀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긍휼의 넓이를 확장하기 위함이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시선이 한 인물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목도할 수 있다.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의 포화 속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의 상처를 밤낮으로 돌보며 ‘등불을 든 여인’으로 추앙받았다. 그녀는 세상의 가장 참혹한 고통을 직시하고 그 안으로 뛰어든 실천적 사랑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녀 자신은 평생 극심한 우울증과 무력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했다. 나이팅게일의 삶은 가장 위대한 헌신 속에서도 개인의 영혼은 깊은 어둠을 헤맬 수 있음을 증언한다. 만약 당시 교회가 그녀의 외적인 업적만을 칭송하고 내면의 신음에는 귀를 닫았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쪽 눈을 허락하셨다. 한쪽 눈으로는 세상의 고통을 바라보며 긍휼을 베풀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우리 공동체 내부의 상처 입은 영혼을 세밀히 살피라는 뜻이다. 평신도바이블아카데미 종강예배에서 되새겼던 주님의 초대는 바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한국 교회는 이제 베네수엘라를 향한 구원의 방주가 되는 동시에, 우울과 불안에 잠긴 성도들에게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보이는 아픔과 보이지 않는 신음 모두를 끌어안는 것, 그것이 바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을 배워 그분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교회의 참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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