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의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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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동안 교회당을 오락가락하며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해도 왜 응답이 잘 안될까요? 그 원인은 ‘자기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입시철만 되면 전국의 교회와 사찰에 입시생 부모들이 넘쳐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젠 무당이나 주술사처럼 그저 “잘 먹고 잘 살자”는 기도는 좀 삼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복적 요구와 주문을 토하며 통을 돌리거나, 탑을 돌거나, 종이를 태우거나, 땅밟기를 하거나, 붉은 천을 장식하거나, 정한수를 바치는 행위는 이방 종교나 하는 주술적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술’이란 행위자의 삶과 관계없이 일정한 형식의 행위를 반복하면 누구나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아주 원시적이며 미신적인 신앙 행태입니다. 자기 변화는 없이 열심히 주문만 반복하는 것이지요. 사실 사당을 강단으로 바꾸었을 뿐이지, 요즘 어떤 교회의 기도는 그것과 무슨 큰 차이가 있는지요. 양식은 먹을 만큼 있으면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는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허구한 날 하는 기도가 돈을 더 달라, 복을 더 달라, 건강을 더 달라, 명예를 더 달라, 이거 달라, 그리고 저거 달라 그저 온통 ‘달라’는 말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라면 주술사처럼 ‘돈과 복’에 빠지지 말고 ‘의와 인’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신도들 모두가 누구든지 항상 성공하고, 이기고, 부유하고, 건강하고, 그리고 장수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이방의 잡신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무속적인 목표들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실제 그렇게 부와 안락을 누리며 살다가 간 믿음의 선진들이 몇이나 있던가요. 오히려 대다수 믿음의 사람들은 거의 다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줄 몰라서 부귀와 영화를 구하지 않고 평생 시골 촌구석 민초들 속에서 가난하게 사셨을까요? 예수님이야말로 단 몇 마디만 기도하셨어도 귀족처럼 부자로 살 수 있으셨을 겁니다. 물로 포도주 공장을 만드시고, 물고기 몇 마리로 생선 가공 공장을 차리셔도 될 테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위해’ 그런 것들을 전혀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과욕을 부리지 말고 적당히 자족하라는 말씀이지요.
만일 내가 너무 많이 취한다면, 남들은 무얼 먹고 살라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 비행기 시간을 연기시킨다면, 나는 좋겠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큰 피해와 손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특혜와 특전을 요구하는 기도는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며, 그게 바로 기독교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즘 돈으로 치부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귀족 목사’들은 양의 탈을 쓴 도적의 무리라고 단정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자기 교회의 일부 교인들은 생활고로 큰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돈을 복으로 미화하며 자기 부를 자화자찬하는 목회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거룩한 고난은 말하지 않고 편리와 안락과 성공을 주로 노래합니다. 그리고 기껏 한다는 설교가 예수 믿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면 복 받고, 형통하고, 잘산다는 거짓말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정말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던가요? 그건 결코 아니지요.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은 그와 정반대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고생길이고, 때론 지지리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양보하고 손해를 보며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기독교는 일부러 가난과 고난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가난이나 고난 자체가 의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귀와 영화를 추구해도 좋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은 왜 이런 진실을 명확하게 안 가르치고, 사이비 무당 같은 소리만 반복하며 늘어놓는 것일까요.
그건 어찌하던 신도들을 기복화하고 무속화하여 가능하면 ‘종교라는 틀’에 묶어 놓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며 종교적 야심을 성취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목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바르게 가르쳐도 틈만 나면 기복으로 빠지는 것이 부패한 인생들인데, 많은 목사님들은 도리어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기복으로 가고 있으니 개신교가 이 모양이 된 것입니다.
특히 상당수의 대형 교회들은 아주 노골적인 ‘기복 교회’로 변질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의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거리가 먼 엉뚱한 것을 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최성균 목사
동백지구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