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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신사참배 (2)

월드미션 기자
작성일 2020-04-0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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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99일 평양의 서문밖 교회에서 회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는 이튿날 회의 때 문제의 신사참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가결 후에 심의현 목사가 신사참배 실행을 특청하여 부총회장 김길창의 인솔로 23개 노회의 대표들이 함께 평양신사에 참배하러 갔다. 한국 최대의 교단인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지 못하고 강압에 눌려 가결한 것과 선교사들보다 더 유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일제의 회유와 강압을 고려하더라도 그들의 내적 문제성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신도에 대한 상반된 견해, 황민화 정책에 세뇌되어 있었던 것, 신학적 입장의 차이로 인한 갈등, 기독교 신앙의 허약함이었다.

장로교 교단의 유일한 교역자 양성기관인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의 교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었다. 남궁혁, 박형룡, 이성휘 교수는 반대하였다. 채필근, 김관식은 학교와 교회는 분리해야 하고 종교는 문부성에서 신사는 내무성에서 관장하므로 신사참배를 종교적 행위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신학교는 주한 장로교 선교회의 결의에 따라 19381학기 수업을 마지막으로 자진 폐교하였다.

감리교회는 중앙집권적인 감독 체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감독의 결정과 지시에 따라야 한다. 1936629일 총독부에서 양주삼 총리사를 초빙하여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므로 교회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적극 참여할 줄 것과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양주삼 총리사는 국민의 의무인 국가적 의례라고 하면 누구나 다 참여할 것이므로 굳이 가결 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193893일 전국의 감리교회들에게 신사참배가 국민의 의례이므로 참석하라는 통고문이 발송되었다. 감리교회는 총독부의 안에 협조하였기 때문에 교단적으로 피해를 보거나 나누어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견해를 달리한 반대자들도 있었고 수난자들도 있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한국교회의 반응은 대략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대다수는 회유와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참배하였다. 둘째로 그것은 국가의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래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도 있었다. 더 나아가 자진하여 일제 당국에 충성을 표하고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밀고한 자들도 있었다. 이 두 부류는 대부분 총독부의 신사의 비종교화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렇게 하여 신사참배가 국가적으로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고 양심의 가책을 회피하려 하였다. 그것은 일본에게 굴복하여 민족적 양심과 기독교적 양심을 동시에 저버린 일이었다. 셋째로 신사에 결코 참배할 수 없다고 하는 소수의 반대자들이 있었다.

반대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의사를 피력하였다. 우선 주한 미국남북장로교, 호주장로교의 한국선교회들은 주로 그들이 경영하던 학교를 폐교하고 교육사업에서 은퇴하는 식으로 저항하였다. 이것이 선교사들에게 선택된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지역을 중심으로 몇 갈래로 진행되었다. 평남의 주기철,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과 주남선, 전남의 손양원, 만주의 헌트와 김윤섭과 박의흠이 그 주축이 되었다.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지역별로 조직화하여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항거자들의 저항과 투쟁방법도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기선 목사는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제를 입학시키지 말고 교회들도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출석하지 말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동지들끼리 모여 예배하고 그 세력을 확대하여 신령한 교회의 출현을 위해 협의하자는 주장을 폈다.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교회의 출석을 막은 것은 물론 노회 부담금도 바치지 말고 아예 노회를 파괴하고 참배 거부자들로 새 노회를 구성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신사에 참배한 목사에게서 세례도 받지 말고 참배 거부자들 끼리 서로 도우며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체하자고 제시하였다. 일제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거나 박관준 장로처럼 일본제국회에 진정서를 투하한 경우도 있었다. 김선두 목사는 일본정계의 요인들을 만나 문제의 타결을 시도하였다. 이만집 목사처럼 금강산에 수양관을 세워 신사참배문제 때문에 피난 온 신도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한 경우도 있었다. 경북 청송의 매산에서는 시온산 제국이란 소종파 단체가 생겨났다. 그 교주인 박동기는 일제의 탄압정책과 신사참배 및 동방요배에 반대하여 군국주의식의 비밀결사운동을 벌였다. 건국기념당을 만들어 기독교 의식을 거행하자는 대안을 만들어 시도한 일도 있었다. 주기철 목사처럼 순교를 각오하며 반대한 이들도 있었다. 이 적극적인 반대자들은 1940년에 대거 검거되어 투옥되었다. 그밖에 해외, 지하, 산야로 망명한 자들도 더러 있었다.

 

최성균 목사(동백지구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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