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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여호수아들, 카렌의 봄을 기다리며”
태국과 미얀마 난민들의 영적 할아버지, 카렌의 ‘푸푸’ 허춘중 선교사

최고관리자 기자
작성일 2026-08-3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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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과 미얀마의 국경 지대, 굽이치는 에모이강줄기를 따라 형성된 척박한 난민촌에는 지난 22년간 묵묵히 그들의 친구가 되어준 한 노(老) 선교사가 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형안(炯眼)을 잃지 않은 허춘중 선교사. 그가 일궈낸 115개의 교회와 1,000명의 현지 지도자라는 숫자는 단순히 선교적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지표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받는 민족이 절망의 심연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길어 올린 생명의 역사이자, 한 선교사의 신학적 신념이 현장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삶으로 번역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다.

허춘중 선교사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역사 인식’과 ‘그리스도인의 현존’이다. 고등학교 시절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난 그는 본래 부흥사를 꿈꾸던 평범한 신학생이었다. 그러나 신학교 시절 마주한 세상은 그가 알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소위 ‘의식화’라 불리는 역사 인식에 눈을 뜨며, 예수 믿는다는 것의 현실적 의미가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신앙이란 단순히 영혼의 구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역사 변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민주화, 사회적 소외가 없는 평화, 경제적 불평등과 인권 착취가 없는 세상을 향한 갈망은 그를 청년 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1975년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격랑 속에서 장로교청년회전국연합회(장청) 상임총무를 맡아 최고 지도부로서 10여 년간 헌신했던 그는, 31세에 안산 반월공단으로 향했다. 당시 30만 명의 노동자가 밀집해 있던 그곳은 부가가치가 낮은 노동집약적 산업이 주를 이루었고,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18년 9개월 동안 이어온 목회는 그에게 ‘낮은 곳으로 임하는 복음’의 실체를 가르쳐주었다. 허 선교사는 단순히 설교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고 그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발로 뛰는 활동가였다. 그들의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이 경험은 그의 선교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50세가 되던 해, 그는 자신을 더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선교지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주변의 우려도 적지 않았다. 이미 한국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닦은 중견 목회자가 낯선 땅으로 떠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더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온 가족과 고등학생 딸을 데리고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의 민주화와 복지 제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판단하에, 그는 치앙마이로 향했다. 처음에는 아시아교회협의회(CCA) 파견 선교사로서 6년 동안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 베트남 등 메콩강 유역 6개국의 개발 선교를 책임지며 현장을 누볐다. 비행기를 타는 대신 험한 길을 직접 운전하며 현장을 누비던 그 시간은 현지인들의 필요(Needs)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소중한 준비 과정이었다. 이후 그는 태국과 미얀마 국경의 난민 선교에 자신의 남은 생을 온전히 투신하게 되었다.

허 선교사의 선교 철학은 ‘성육신의 신학’에 기반한다. 허 선교사는 선교사가 우월감을 가지고 현지인을 계몽하려 드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에게 복음이란 현지인의 역사와 문화, 관습 속으로 깊이 침투하여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정치·경제적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단순히 영적인 구원만을 강조하는 것은 현지인의 삶을 파편화하는 오산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따라서 그는 선교를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자 ‘더불어 살아주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웃 사랑이란 관념적인 구호가 아니라,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난민 아이들을 교실로 보내고,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돌보며, 굶주린 이들에게 쌀을 나누는 구체적인 행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국경지역 난민을 돌보는 교회의 사회선교 역량 강화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2008년, 멜라 난민 캠프의 사이몬 박사와 뉴턴 목사의 제안으로 시작된 ‘등불 신학교(Hill Light Theological Seminary)’는 그 결정체다. 나무 밑에서 단 6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현재 132명의 학생과 17명의 교수를 갖춘 4년제 명문 신학교로 성장했다. 특히 교수진 17명 중 5명이 목회학 박사 학위를 소지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허 선교사는 현지 목회자 지도자들과 매우 가깝게 지내며 그들과의 협력을 통해 난민 교회들의 실질적인 선교 역량을 강화해왔다. 허 선교사는 학교를 세울 때 건물을 먼저 짓지 않았다. 대신 학생들을 먼저 모으고, 그들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집중했다. 나무 밑에서 시작된 수업은 학생들의 열정과 허 선교사의 헌신이 더해져 점차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허 선교사는 설립자임에도 불구하고 총장이나 이사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카렌족의 언어와 비전을 가진 현지인이 주도해야 한다는 그의 확고한 ‘현지화’ 원칙 때문이다. 그는 시설보다 학제와 커리큘럼, 그리고 졸업 후의 진로를 먼저 고민하는 실질적인 선교를 추구해왔다. 학생들이 졸업 후 갈 곳이 없으면 신학교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졸업생들의 진로를 지도하고 그들이 사역할 수 있는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그 결과 230명이 넘는 졸업생이 배출되어 각지에서 목회자로 헌신하고 있으며, 이들은 자립을 위해 매년 후배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학생들이 4년 동안 기숙사에서 먹고 자는 비용을 전적으로 지원하지만, 졸업 후에는 반드시 후배들을 위해 기부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졸업생들이 한 달에 100밧, 1년에 1,000밧씩 모으는 돈은 후배들의 식비와 장학금으로 사용되며, 이는 카렌 교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서 나가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이러한 ‘자립’ 강조는 선교지가 외부의 원조에만 의존하는 ‘의존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허 선교사의 사역은 교육을 넘어 경제적 자립과 지역 개발로 확장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암소 은행’ 사역이다. 그는 지금까지 1,000마리 이상의 암소를 난민 가정에 보급했다. 소는 방목이 가능해 사료비가 들지 않고 병에 강하며, 팔면 목돈이 되어 아이들의 학비나 생활비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소만 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를 하나의 공동체 훈련 과정으로 승화시켰다. 소를 받은 가정들은 매달 한 번씩 모여 교육을 받는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수의사를 통한 과학적 축산법은 물론, 근면 성실한 삶의 태도, 자녀 교육의 중요성, 가정폭력 및 마약 근절, 준법정신 등을 배운다. 무엇보다 소를 키워 얻은 수익의 십일조를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영적·경제적 자존감을 회복하도록 돕는다. 소 한 마리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다시 자라나면서 난민 가정의 경제 상황은 눈에 띄게 개선되었고, 이는 곧 마을 전체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마을 전체가 기독교 공동체로 변모하고, 술과 담배가 사라지며,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한 마을은 주민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교회 중심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신앙 공동체로 거듭나기도 했다.

또한 학교 주변의 텃밭과 농장을 개간하여 학생들이 직접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배우고 생명 농업을 실천하도록 돕고 있다. 그는 또한 11개의 학교와 15개의 라오스 교육 시설을 세우며 4,000여 명의 학생에게 미래를 선물했다.

허춘중 선교사의 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축은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이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평화가 하나님의 핵심 뜻임을 믿으며, 민주주의를 하나님 나라와 가장 가까운 정치 제도로 이해한다. 자국민을 학살하는 미얀마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예언자적 사명이라는 것이 허 선교사의 확신이다. 미얀마 군부의 폭압적인 통치를 목격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침묵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느꼈던 그는 난민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정치적 억압에 있음을 간파했다. 그들이 인간다운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 현지 민주화 세력을 지원해왔다. 과거 한국에서 독일의 본 훼퍼의 정신으로 독재에 맞섰던 것처럼, 지금도 미얀마의 고난받는 이들 곁에서 그들의 민주적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만든 제도 중 가장 성서적인 제도”라고 역설하는 그는, 카렌 민족이 정치적 자유를 얻을 때 비로소 진정한 선교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허춘중 선교사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원인을 ‘물질주의’와 ‘편의주의’에서 찾는다. 나누지 않는 것은 성경적으로 죄악이며, 교회가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공감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수양관에서 물량 공세를 퍼붓는 여름 성경학교 대신, 아이들에게 선교지의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녀들에게 물량 공세를 퍼붓는 대신, 선교의 가치와 고난에 참여하는 기쁨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교해서 망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그의 말은, 움켜쥐려 할수록 잃어버리고 나누려 할수록 풍성해지는 복음의 역설을 웅변한다. “나누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한국 교회가 다시금 근검절약과 선교의 열정을 회복하기를 촉구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현장을 누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성경책과 함께 난민들의 삶을 개선할 아이디어가 가득 담긴 노트가 들려 있다. 2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난민촌의 아이들과 교수들은 그를 ‘선교사님’이나 ‘총장님’ 대신 ‘푸푸(할아버지)’라고 부른다. 그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다는 허 선교사. 그는 자신을 우월한 시혜자가 아닌,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진정한 친구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내주시고 길을 열어주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일하게 하셨다”는 그의 간증은, 선교가 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115개의 교회와 1,000명의 지도자라는 열매는 그가 뿌린 눈물과 땀의 결실이며, 동시에 카렌 민족이 스스로 일구어낸 승리의 기록이다. 카렌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얀마의 정치 상황은 여전히 안개 속이고, 난민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하지만 허춘중 선교사가 심은 이 영적 유산은 이미 그 땅의 희망이 되었다. 그들이 부르는 찬양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미얀마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고 있다. 허 선교사는 오늘도 그 등불을 지키며, 카렌 민족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여호수아처럼 일어설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22년 여정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잇는 예언자적 신앙이 어떻게 한 민족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서사시로 우리 시대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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