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한국 기독교인의 역할 컸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신년감사예배 및 38차 열린대화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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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가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돌아보고 한국 기독교와 독립운동의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는 지난 1월 18일 서울 종로구 소재 연동교회에서 ‘2019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신년감사예배 및 38차 열린대화마당’을 개최했다.
이날 열린대화마당에서 ‘3.1운동과 기독교’라는 제하로 발제에 나선 이만열 교수(전 숙명여대 교수)는 “당시 기독교인 전체 인구의 비율은 전체의 1.5% 내외에 불과하지만 기독교인이 3.1운동에서 행한 역할은 2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만열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당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311개 지역에서 340여회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 주관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은 78개 지역이었고 천도교 66개, 기독교와 천도교 합작 42개 지역으로, 기독교가 25% 내지 38%였다고 밝혔다.
특히 만세운동의 결과로 투옥된 이들의 숫자를 보면 한국기독교가 만세운동에 어느정도 참여했는지 알수 있는데 이만열 교수는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하였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이고,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였다”면서 “이 통계는 바로 기독교인의 운동량으로 계량화한 것이라고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당시 한국의 인구와 대비해 보면, 기독교인의 역할은 더욱 뚜렷해진다”면서 이 때 한국의 인구가 1,600만 명 정도였는데, 1918년의 장로회 감리회의 교인은 212,703명(장로회 교회 3,471, 교인 160,919 / 미국감리회 교회 655개, 교인 41,044명 / 남감리회 교회 238개 교인 10,740)으로 나와 한국 인구의 1.5% 내외의 기독교 인구가 3.1운동에서 행한 역할은 2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그 역할을 설명했다.
이 교수는 당시 최대 교단이었던 천도교와의 교세 비교를 통해서도 기독교의 만세운동 역할을 돌아봤다. 특히 1919년 3월 천도교 교수 손병희의 법정 진술과 비교해 보면 손병희는 천도교 신자의 숫자를 묻는 재판장 신문에 대해 명부 등재자 300만 명, 의무 부담자 200만명이라고 는 증언(물론 이 숫자는 잘못 진술된 것)에 대해 이 교수는 “이는 당시 기독교세의 10배에 달하는 교세”라면서 “(천도교는) 19세기 말 이래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흐름인 민중사상계를 이끌어 온 세력으로 사상면이나 교세면, 그리고 민중동원 능력 면에서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지만 3.1운동에서 활동한 역량은 그보다 10분의 1정도의 세력밖에 되지 않는 기독교보다 절대적인 수치에서도 뒤떨어지고 있다”고 강조하고 “이것은 반대로 기독교가 이 운동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반면 기독교도의 참여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일제의 박해도 다른 종교에 비해 컸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이만열 교수는 자료를 통해 제암리교회당에서 비신자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29명이 희생되었으며 1919년 3.1운동으로 한 달이나 늦게 그것도 그해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3.1운동으로 ‘미참’(未參)한 상황에서 열린 장로교 제8회 총회에서는 사살, 타살 52명(각 노회보고), 체포된 신자 3,804명(이 가운데 목사 장로 134명 : 장로교 전체 목사 장로 1024명 가운데 14%에 해당)이나 되었다고 전했는데 총회에 보고한 노회의 보고는 ‘대한(조선)독립운동’ 혹은 ‘독립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운동이 전국화되는 단계에서 기독교가 갖는 문제 또한 없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날) 기독교 대표 16명 가운데 4명이 불참하였는데 그 이유가 납득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당일 서울의 선언발표 장로를 명월관(泰和館)으로 옮긴 것이 선교사 베커(Becker)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기독교 운동의 한계와 관련된다고 할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일제가 폭력으로 나오는 데도 교단적 차원의 대응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한 이 교수는 제암리의 만행을 세계에 알려 그 여론을 환기하는데는 선교사 스코필드(Scofield) 등의 노력이 있었지만 당시 장로교 감리교 연합기관지인 기독교보 등의 보도 태도는 일제의 언론검열 때문이었다고 하나 그 대응이 대단히 미약했다고 지적했다.
기독교가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에 대해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계의 교단 조직화가 이 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장로교의 경우, 1907년에 독노회를 조직하고, 1912년에 총회를 조직하는 등 교단을 조직화하였는데 미감리회는 1908년에, 남감리회는 1918년에 각각 ‘연회’를 조직한 후 연회 산하에 지방회를 구축했다”면서 “그런 상황에서 1918년에는 일제가 조선기독교를 장악하기 위한 협의회를 조직하려 하자 이에 대항하여 연합단체를 결성하였고 그렇게 함으로 기독교계는 3.1운동에 앞서 전국적인 연락망을 구축하게 되어 3.1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일제 강점하에서 종교기관만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집회의 자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경계했던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이 역설적으로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가능케 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만열 교수는 “한말이래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 민족운동이 전통이 3.1운동으로 발전해 갔다고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한국의 기독교 민족운동은 한말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3.1운동을 주도해 나갔다고 보여진다”면서 1905~1910년 사이의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족운동은 장인환의 스티븐스 암살, 전덕기의 을사오적 처단 미수, 안중근(가톨릭), 우덕순(기독교)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미수 등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는데 이렇게 한말부터 기독교인들은 매국원흉 제거 등에 앞장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의 자료에 의하면 일제가 강점한 후 기독교회의 예배를 방해하고 설교에 제재를 가하는 등 종교적인 자유마저 박탈하려 하였는데 특히 금주. 금연에 관한 설교나 ‘다윗과 골리앗’을 주제로 한 강론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특히 강점한 지 얼마 안되어 벌인 ‘105인 사건’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려 한 사건으로 1905년에는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고 포교법을 제정하여 기독교학교의 성경공부와 채플 등을 금지하고 선교를 방해하면서 한국인에 대한 생존권의 위협에다 이제는 신앙의 자유마저 빼앗겨 버리려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하고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도 궐기치 않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